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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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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17:12:00
제7회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희생자 위령제
"65년만에 전달하는 보은패, 1950년 제헌국회의원들의 하의3도 농지무상환원 결의에 감사"

신안군(군수 고길호)은 10월 9일 제7회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희생자 위령제를 하의면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사)하의3도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학윤) 주관으로 열리는 금번 위령제에는 1950년 제헌국회에서 ‘하의3도농지에 대한 무상반환’ 결의에 대한 하의3도민들의 보은의 마음을 전하는 의식이 포함된 것이 이채롭다. 당시 제헌국회를 대신해 현 대한민국 국회를 대표하는 정의화 국회의장이 뜻깊은 보은패를 받게 된 것이다.

위령제는 하의면, 신의면 주민들과 정의화 국회의장, 고길호 신안군수, 이윤석 의원 등 200여명이 참석하며 제주사에 이어 영령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도사와 추모사, 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생자들을 위한 씻김굿 공연도 이어진다.

하의3도는 현 신안군 하의도, 신의면의 상태도와 하태도를 칭하는 것으로 세 섬사람들의 잃어버린 제 땅찾기 사연은 39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 인조 임금은 선조대왕의 딸 정명공주가 풍산홍씨 홍주원과 결혼함에 따라 하의3도의 땅 20결(약 8만평)을 무토사패(無土賜牌; 농지소유권은 농민에게 있고, 4대손까지 세금 징수권만 주는 것)하였으나, 후손들은 오히려 하의도 전체 토지에 대한 도세를 징수했으니 이때부터 하의3도의 비극은 시작됐다.

결국 불의에 맞선 하의3도민들은 머나먼 한양까지 올라가 소송을 제기하기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도가의 횡포와 핍박을 받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미군정기, 정부수립에 이르는 동안 일본인 지주 등 수차례 땅주인이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하의3도민들은 진정과 재판, 소작료 불납운동 등으로 끊임없이 저항했다.

광복이 된 후에도 토지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해 하의3도 땅은 미군정청을 거쳐 신한공사에 의해 소작료 징수가 강행됐고, 급기야 1946년 신한공사와 경찰이 하의3도 주민 1천명과 대치하여 총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1949년 주민들은 억울한 사연을 제헌국회에 탄원하였고, 국회는 그 해 8월 현지조사단이 섬에 파견하여 현지를 확인한 후, 195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하의3도민들에게 소유권 무상반환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한국전쟁기를 지나 1956년 비금출신 유옥우 의원의 조정을 통해 귀속농지를 불하받는 형식의 소유권 이전등기가 진행됐고, 누락된 필지에 대해 신안군과 군의회의 1994년 3개월간 특별조치를 통해 마무리됐다.

이처럼 370여년에 걸친 하의3도민들의 농지탈환 과정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랜 농민운동이었고, 땅을 생명처럼 여기며 불의에 맞서 의연하게 싸워왔던 숭고한 정신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기념하고자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이 2009년에 개관했으며, 개관식에 참석한 고 김대중대통령도 하의3도 사람들이 불의에 맞선 정신이 자신에게도 흐른다‘라고 하였다. 기념관에는 긴 세월 동안 하의3도민들이 겪은 수난과 고초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제공: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240-8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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